책글창고

늙어가는 아내에게

시린콧날 2007. 6. 20. 16:28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탑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 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수 있을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수 있는 말일거야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 지성사]

---------------

90년에 나온 황지우의 시. 지금같은 사랑 과잉시대에 '고루하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표현하는 것이 사랑이다"라는 명제 앞에서 있는마음, 없는마음을 모조리 드러내야 하는 요즈음. 얼마전 '키스데이' 행사를 보고 나서 느꼈던 씁쓸함, 아연실색. 그래서, 때론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 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말을 내뱉기까지의 불확실, 고민들... 그러다 결국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었을때 느껴지는 치.떨.림. 같이 아파할 수 있는것, 그래야 사랑이다. 내뱉었을때 허망하게 휘발되고 마는 가벼움이 아니라 전해졌을때 그 무게로 새겨지는 사랑. 그래야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