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수 없는 소통의 어려움, 바벨
영화에 대한 다른 정보를 몰랐다면 단지 우연히 보게된 영화 예고편 때문에 영화를 놓치게될 뻔했을지도 모르겠다. 흥행을 보장해야 하는 예고편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겠지만, 예고편은 영화를 제대로 왜곡하고 있다. 그 짧은 클립을 보고나면 이 영화가 서구시각으로 편집된 뻔한 테러무비, 일종의 스릴러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걸 기대하고 본 사람들은 '낚였다'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인터넷에서 보이는 감상평이 극단으로 갈리는건 그 때문이다.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는 브래드피트의 이름이 예고편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것도 그가 이전에 보여줬던 이미지에 기대려는 것이겠지만 웬걸, 이 영화의 브래드피트는 전혀 브래드피트 같지 않다.
이렇게 좋은 영화를 보고나면 주절주절 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을 가중시키고 분열과 싸움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 조심스러워진다. 글을 쓰는 것이 나를 타인에게 이해시키려는 것이라면 이 즈음에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나면 '침묵은 금이다'라는 옛 어르신들의 명언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진다. 노자 도덕경의 '道可道 非常道'(말할 수 있는 도는 항구적인 도가 아니다)도 휘릭 스쳐간다. 영화에서도 그나마 갈등을 봉합하고 작은 화해를 말하는건 말이 아닌 몸짓이다. 마주잡은 손, 짙은 포옹, 눈빛... 때론 그게 진실이라는것을 이 영화는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추방당해 돌아온 멕시코에서 아들과 포옹하는 아멜리아. 그 서글픔을 끌어안듯이 둘의 짧은 포옹은 여운을 남긴다.
에두아르 부바가 찍고 미쉘 투르니에가 글을 붙인 '뒷모습'이란 책을 보면 진실은 말을 하는 앞모습이 아니라 말을 끝내고 돌아서는 뒷모습에 있다라는 걸 알게된다. 표현하려고 하는 것,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현대사회에 살면서 살면서 매일 타인과 이야기를 하고, 소통하기 위한 수단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지만, 진정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은 점점 더 아득하기만 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오해만 늘고, 통하지 않는다는 단절감이 더 짙어만 진다. 영화에서 보이는 단절감은 언어차이가 일차적인 원인으로 보이지만 같은 말을 쓰고 있어도 다를건 없다는걸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에서는 중첩된 단절이 존재한다. 언어적인 장벽, 인종적인 장벽, 문화적인 장벽, 공간적인 장벽...그 어느하나 쉽게 뚫고 소통하기 힘든데 이 영화에서는 그게 중첩되어 사건을 만들고, 갈등을 빚어낸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때까지 답답해진 가슴은 해소되지 않는다. 인종적인 차별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크래쉬를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더 잔향을 남기는건 그 렌즈를 미국사회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공간속에서 조명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인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보편성을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공간을 엮어가는 매개들이 다소 억지스러운 점은 있지만 시간을 뒤집으며 자연스레 이어붙인 편집은 스토리의 우연을 덮어준다.
뻘소리 한마디 더 한다면,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이론을 제시하며 "오늘날에는 곳곳에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 있습니다. 저는 이 안개가 걷힐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 했다지만 아직은 저 멀리 있는 꿈이다. 그가 해결책으로 제시한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지기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이 아닐까.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문제가 아니라 점점 제대로 '의사소통'하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현대사회. 그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적 기능을 넘어서, 논의와 담론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적 합리성이 필요하다고 얘기했지만, 바벨을 보며 느낀건 지금 필요한건 합리성, 이성적 의사소통 이전에 말하기, 대화하기, 이해하기, 듣기...그 기본적인 것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화가 제시한 사람 사이에 놓인 중첩된 단절을 뚫고 너와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차가운 이성보다 따뜻한 감성이 필요하다.
국외추방. 오해, 저들이 나를 이해해줄수 없다는 절망에서 나오는 도피. 그 끝은 살아온 곳에서의 추방이다.
인상적인 몇가지들,
아드리아나 바라자, 영화의 주연으로 멕시코 가정부 아멜리아를 연기한 이 분을 꼽고싶다. 황량한 샌디에고 사막을 헤매이던 그녀의 발걸음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남겨진 아이의 눈망울보다 빨간색 드레스가 다 헤지도록 걷고, 걸었던 그녀의 몸짓이 더 짠했다. 구멍난 스타킹보다 전날 사랑을 나눌때 빛나던 그 드레스의 남루함이 더 눈가에 남더라. 그녀가 피부색 다른 아이를 키우며 십년을 넘게 살아온 미국사회에 언어는 소통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히스패닉이라는 인종적인 차이는 더이상 벌어진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결국 넘어설 수 없는 소통불가의 벽이 된다.
케이트 블란쳇, 영화에서는 그닥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않지만, 총맞기 직전 버스창가에 앉아 황량한 모로코 풍경을 응시하는 모습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빛이 났다. (전혀 영화와 무관한 감상.) 영화초반 무작정 이곳에 데려온 남편을 원망하며 '이 곳 물을 먹고 죽을 수도 있다'며 다이어트 코크를 찾던 신경쇠약직전의 여자는 총맞은 이후 별다른 화해의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짧은 시간 모로코 빛도 안드는 그 집에 머무르고나서 마음가짐에 변화가 있었을거라고 짐작해볼 순 있다.
그의 눈물이 더욱 깊어져 짐캐리처럼 스스로의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브래드 피트, 그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던걸까. 동분서주, 말도 안통하는 이역만리에서 아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던 그의 모습은 잘빠진 마초의 모습이 아니라 남편이자,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도 이렇게 늙어가는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브래드 피트의 영화를 보며 그 얼굴에 담긴 마음을 읽고싶어질줄은 몰랐다. 일이 마무리되고 공중전화에서 마크와 통화하며 울컥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