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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상처

시린콧날 2006. 5. 23. 01:07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허수경 (문학동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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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먼 내 속 - 허수경

녹차와 아주 친한 아는 분이 언젠가 물의 상처에 대해 들려주셨다. 물은 서로 부대끼며 흘러가다가 서로에게서 상처를 받는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또 상처를 받는다. 녹차를 끓일 물은 그러므로 그 상처를 달래주어야 한다. 물을 두서너 시간 전에 받아두어라. 그런 다음 물을 끓이는데, 물은 또 끓을 때 상처를 받는다. 그러므로 끓고 난 뒤 물을 미지근하게 식혀라. 모두 물의 상처를 달래주는 일이다. 그런 다음 차에 물을 부어라.

내 속이란 얼마나 컴컴한가. 아마도 물에게는 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제일 상처 입는 일은 아니었을까. 흐르다가, 끓다가 입은 상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진탕에서 입는 상처...

허수경의 『길모퉁이의 중국식당』中에서...


내가 자주가는 인사동의 지대방에서 '세작'을 시키면 여러개의 잔이 나온다. 정확한 잔의 용도를 몰라 헤메곤 했는데, 그래서 그 잔중 몇개는 쓰지도 않고 보온병의 물을 다 우려 마셔버렸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그 잔중에 하나는 뜨거운 물을 식히는 용도라는 걸 알게 되었다. 뜨거운 물보다는 조금 식은 물에 녹차를 잘 우릴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허수경의 이 글을 읽으니 녹차에 물을 식히는 잔이 필요한 이유를 이제서야 알겠다. 팔팔끓인 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그 잔이 필요했으리라. 다음에 지대방에 가면 물이 식을때까지 그 상처가 아물때까지 차분히 기다릴 수 있을 것만 같다.

2004.1